[2006/08/23] 우리말) 이상한 병

조회 수 7844 추천 수 117 2006.08.23 09:17:00
안녕하세요.

저는 병이 하나 있습니다.
한 5년쯤 전에 걸린 것 같은데
이 녀석은 시도 때도 없이 수시로 도집니다.
책을 볼 때도 도지고,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도 도지고,
텔레비전 볼 때도 도지고,
술을 먹을 때도 도집니다.
증상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어찌 보면 한 가지 증상입니다.

이 병이 무서운(?) 것은 그 전염성 때문입니다.
전염성이 강해 제 아내도 걸렸고,
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감염됐습니다.
이제는 네 살배기 제 딸내미에게까지......

어제는 책을 볼 때 그 병이 도지더군요.
증상을 설명드릴 테니 무슨 병인지 좀 알려주세요.

어제는 을지연습 때문에 상황실에서 밤을 고스란히 새웠습니다.
자정이 넘으니 수없이 쏟아지던 상황도 좀 잦아들더군요.
눈치를 보며 슬슬 가져갔던 책을 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를 다룬 소설책인 '뿌리 깊은 나무'라는 책입니다.

책을 읽다 보니,
책 내용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이상한 것만 눈에 보이는 겁니다.
또 병이 도진 거죠.

제 병의 증상은 이렇습니다.
책을 읽을 때,
'침전에 드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라는 월을 읽으면,
발자국은 소리가 나지 않는데... '발자국 소리'가 아니라 '발걸음 소리'인데...

'땅 바닥에 뭔가를 끄적거렸다.'라는 월을 읽으면,
끄적거리는 게 아니라 끼적거리는 건데...

'누룽지를 후루룩 마셨다'는 월을 보면,
누룽지는 딱딱해서 후루룩 마실 수 없는데... 눌은밥을 후루룩 마셨을 텐데...

이렇게 책을 읽을 때 내용은 뒷전이고,
맞춤법 틀린 곳만 눈에 확 들어옵니다.
저는 내용에 푹 빠지고 싶은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병일까요?

텔레비전 볼 때는 자막 틀린 게 눈에 확 들어오고,
술 먹을 때는 술병에 붙은 상표에 있는 틀린 글자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병이죠?


요즘은 제 딸내미도,
"아빠, 이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죠? 그쵸?"라고 합니다.
딸내미도 증세가 심각합니다.
아마 곧 두 살배기 아들에게까지 전염될 것 같습니다.
어떡하죠?

누구 이 병의 이름을 알면 좀 알려주세요.
치료방법도 같이... ^___^*

우리말123 ^^*


아래는 예전에 보내드린 우리말편지입니다.

[세 번째 의뢰인]

오늘도 날씨가 참 좋을 것 같네요.
이 좋은 날씨만큼 좋을 일만 생기시길 빕니다.


요즘 제가 고민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밤에 잠을 설치기 일쑤죠.
어젯밤에도 잠이 안 와서 거실에 나와 텔레비전을 보는데,
결혼식장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사가 한 말이 귀에 들어오더군요.
“자, 조용히 하시고, 이제 찍습니다. 거, 왼쪽에서 두 번째분 좀 웃으세요!”
흔히 사진 찍을 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오늘은, ‘첫째’와 ‘첫 번째’의 차이를 좀 알아볼게요.

‘첫째’는
사물의 차례나 등급을 나타낼 때 씁니다.
나란히 있는 사람이나 물건의 차례를 나타내므로,
‘둘째 줄의 셋째 학생, 첫째 줄의 둘째 책상’처럼 씁니다.
반에서의 석차, 태어난 형제나 일의 순서, 책의 차례 등도 이 같은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장한 둘째 아들, 국문학 첫째 장, 학급 석차 열셋째 따위로 쓰죠.

‘첫 번째’는
연이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일의 횟수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첫 번째 경기(제일회전), 두 번째 경기(제이회전)
두 번째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첫 번째 물음 따위로 쓰죠.

따라서,
트랙을 세 번째 돌고 있는 선수,
미국을 네 번째 다녀오신 선생님 등은 맞는 표현이죠.
그러나
‘우리나라 선수단이 아흔세 번째로 당당하게 들어오고 있습니다’는 틀립니다.
‘번째’는 반복되는 일의 횟수라고 했잖아요.
입장식에는 어느 나라 선수나 한 번씩만 들어오지 않나요?
우리나라 선수만 수십 번씩 들어올 리가 없잖아요.
‘아흔셋째로’라고 해야 맞습니다.

‘지구상에서 두 번째로 큰 아프리카 대륙’도 틀립니다.
‘둘째로 큰’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잘 사는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둘째로 잘 사는’이 맞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 프로 ‘진품명품’에서 사회자가 한 말,
“다음에는 세 번째 의뢰인을 모셔보도록 하겠습니다.”도 당연히 틀린 말입니다.
‘세 번째 의뢰인’은 의뢰를 한 번하고, 두 번하고, 세 번째에 또 의뢰한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사회자가 말하고자 하는
그 방송에서 첫째 소개, 둘째 소개에 이어 다음 소개하는 사람은,
‘셋째 의뢰인’입니다.

어쨌든,
‘번째’는 반복되는 일의 횟수라는 것만 기억하면
‘째’와 ‘번째’를 헷갈리지 않으실 것 같네요. ^^*

오늘 저는,
월간지에 네 번째 내는 원고 마무리해야 하고,
제 책상 왼쪽 둘째 칸에 있는 책이나 좀 정리해야겠네요. ^^*

오늘 날씨만큼 행복하게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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