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5/23] 우리말) 자린고비

조회 수 2893 추천 수 61 2007.05.23 10:42:22
자린고비는
"부모님 제사에 쓰는 지방 종이도 아까워 기름에 절여 쓰는 사람"입니다.


안녕하세요.

내일 초파일이 아버님 제사라서 저는 오늘 저녁에 고향에 갑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지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네요.

어떤 못된 불효자식이 있었습니다.
딸 부잣집의 외아들로 태어나 온갖 귀여움은 다 받고 자랐고,
누나들은 대학을 안 보냈지만 그 아들만은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 아들이 대학 3학년 때 환갑을 맞아 잔치를 벌였는데,
마침 잔치 하루 전날 영장 받고 군대에 들어가버렸습니다.
복 없는 아버지는 딸만 일곱을 세워놓고 환갑 상을 받으셨죠.
그 못된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다 공부 좀 더 해보겠다고 사표 내고 대학원에 들어갔습니다.
빨리 장가가서 대를 이으라는 부모님 뜻을 저버리고 제 욕심 채우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간 거죠.
대학원 석사 졸업식 때 부모님이 오신다는 것을,
"박사과정에 합격했으니 박사 졸업식 때 오세요. 지금은 몸도 불편하신데..."라며 말렸는데,
박사과정에 들어가고 100일 만에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장가가는 것도 못보고, 박사모도 못 써보시고...
위암으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36kg밖에 안 나가는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등 밀어드린 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간 것이었고,
목욕탕에서 나와 아버지가 좋아하는 낙지를 사 드린 게 아버님께 마지막으로 사드린 점심이랍니다. 물론 단 한 점도 못 드셨지만......
그래서 그 아들은 지금도 아버지 제사상에 낙지를 꼭 올립니다.

자린고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몹시 인색한 사람을 이르는 말인데요.
'자린'은 절이다에서 왔습니다.
옛날에 어떤 부자가 제사 때마다 쓰고 태워 없애는 지방 종이가 아까워
지방을 기름에 절여 썼다고 합니다.
자린고비는 "기름에 절인 고비"라는 말입니다.

고비는 지방에서 나온 말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현고(顯考), 돌아가신 어머니는 현비(顯)라고 하는데,
현고의 '고'와 현비의 '비'를 따서 고비(考)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자린고비는
"부모님 제사에 쓰는 지방 종이도 아까워 기름에 절여 쓰는 사람"입니다.
아껴? 껜?것도 좋지만 이것은 좀 심하죠?

돌아가신 분께 기름에 절인 지방을 쓰건 좋은 종이를 쓰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자연으로 돌아가시기 전에, 함께 있을 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해 드리는 게
걸게 차린 제사상보다 백배 천배 가치 있는 일일 겁니다.

이 불효자는 오늘도 낙지를 사들고 아버님께 잘못을 빌러 갑니다.

우리말123


아래는 예전에 보내드린 우리말 편지입니다.

[불초소생]

오늘은 ‘불초’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흔히 자기 자신을 낮추어 말할 때,
“불초소생이 어쩌고저쩌고”라고 합니다.
“불초소생인 저를 뽑아주셔서 어쩌고저쩌고...”
“불초소생인 제가 막중한 임무를 맡아 어쩌고저쩌고...”
보통 정치인이나 고관대작들이 많이 쓰는 말입니다.

근데 이 ‘불초’라는 낱말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식과 임금만 쓸 수 있는 말입니다.

불초(不肖)는
아니 불, 닮을 초 자를 써서,
자기의 아버지를 닮지 못했다는 말로,
자식이 부모에게 자기를 낮추어 말하는 것입니다.
또, 임금이 선왕을 닮지 못해 큰 뜻을 따르지 못한다는 겸손한 의미로만 씁니다.
맹자(孟子) 만장(萬章)편 상권에 있는 말이죠.

따라서,
‘불초소생’은,
‘제가 아버지의 큰 뜻을 따라가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의미로 씁니다.
부모님께 드리는 이런 겸손한 말을,
시궁창에 처박혀 사는 정치인들이 세 치 혀로 언죽번죽 지껄이면 안 되죠.

돌아오는 일요일이 돌아가신 아버지 제사입니다.

아버지는 생전에 남에게 많은 것을 베풀도록 저를 가르치셨죠.
오죽했으면,
7대 독자인 제게,
“남들이 진정으로 원하면 네 XX도 떼 줘라.”라고 하셨으니까요.

자신에게 소중한 것도
남들이 필요하다면 뭐든지 내주라는
선친의 가르침을 저는 못 따르고 있습니다.
남을 챙겨주고 배려하기는커녕,
작은 것에 집착하고, 사소한 일에 짜증내고...
부질없는 욕심에 마음 아파하고...

이런 ‘불초소생’이
앞으로는 남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배려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러
아버지를 뵈러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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