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9/03] 우리말) 도복

조회 수 2315 추천 수 102 2010.09.04 09:51:49
바람의 강도를 표시하는 계급이 풍력계급입니다.
현재 널리 사용되는 것은 1805년 보퍼트가 만든 보퍼트 풍력계급을 1964년 개정한 것입니다.
0부터 12까지 13개의 풍력계급이 있고,
계급번호가 클수록 풍속이 셉니다.



안녕하세요.

이번 태풍에 별 일 없으셨죠?
어제 오후에 남부지방에 갔다가 조금 전에 돌아오면서 보니 여기저기 나무가 부러지거나 쓰러진 게 많이 보이더군요.

어제 받은 편지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태풍 피해는 없으신지요?
오늘 아침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이해되지 않는 말이 있어서 이렇게 메일을 드립니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무슨 정부기관에 있는 담당자와 통화를 하는데, "벼가 도복되었다."라고 하더군요.
진행자가 "네?"라고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그러자 또 "벼가 도복되었다."라고 하더군요.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찾아보니
도복
1
[倒伏]
[명사] [농업] 작물이 비나 바람 따위에 쓰러지는 일.
라고 되어있더군요.
아마도 쓰러졌다는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냥 벼가 쓰러졌다고 하면 안되나요?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다보니, 전광판에 반포 -> 한남 정체 가로수 도복이라고 되어있더군요.
쉬운 우리말을 쓰면 더 많은 사람이 알아듣기 쉬울텐데..
고쳤으면 좋겠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


이러한 편지를 받고 제가 이렇게 답장을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전에 제가 농민 강의를 다닐 때,
다비하면 도복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다비라는 말은 비료를 많이 준다는 말이고,
도복한다는 말은 쓰러진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다비하면 도복한다는 말은
비료를 많이 주면 벼가 잘 쓰러진다는 말입니다.

다비나 도복을 저는 무슨 전공용어나 되는것처럼 썼습니다.
알고보니 모두 일본말 찌꺼기더군요.

좋은 지적 고맙습니다.
예전에 쓴글을 하나 붙입니다.

고맙습니다.

성제훈 드림


오늘치 예전에 보낸 편지는
앞에서 소개한 파일을 붙입니다.

고맙습니다.


보태기)
오늘 편지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터넷이 안 되는 호텔에서 잤고,
이제야 일터에 돌아왔습니다. ^^*        



[전문용어와 일본말]


“수도작을 배우시려면 독농가 ○○○ 씨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그 분야에 일가견이 있으시거든요.”
“수도작은 시비관리가 중요합니다. 다비하면 도복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농촌진흥청에서 일하면서 가끔 강의를 나갔는데, 그럴 때면 대학 전공시간에 배웠던 농업용어를 전문가의 가보처럼 여기며 이런저런 강의에서 떠들고 다녔다. 어느 날 강의가 끝나고 한 분이 조심스럽게 물어오셨다.
“수도작이 상수도에요, 하수도에요? 농업에도 상수도를 쓰나요? 독농가는 혼자 농사짓는 분을 뜻하나요? 일가견은 한쪽 눈으로만 보는 사람인가요? 눈이 아픈가요?”
“시비관리는 경찰서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농진청에서 사람들 싸우는 것도 말리나요?”
“다비하면 도복한다는 말은, 비가 많이오면 태권도복이 젖는다는 말인가요?”

“예, ‘수도작’은 물에서 키우는 벼라는 뜻이고, ‘독농가’는 모범농가라는 뜻입니다. ‘일가견’은 어떤 분야에서 한가락하는 뛰어난 것을 말합니다.”
“시비관리는 비료를 잘 주는 것을 뜻하고, 다비는 비료를 너무 많이 준다는 뜻이며, 도복은 벼가 쓰러진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럼 그렇게 쉽게 말씀하시면 되지 왜 사람 헷갈리게 ‘수도작’이나 ‘독농가’, ‘일가견’, ‘시비관리’, ‘도복’이라고 하시죠?”
“.........”
할 말이 없었다. 그 분 말씀처럼 그렇게 쉽게 설명하면 될 것을 무슨 지식 자랑할 게 있다고 일부러 어려운 낱말을 골라서 썼던 것이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런 낱말이 모두 일본말에서 온 거라는 것을 알았다.
사전에도 독농가는 ‘모범농가’로 다듬어져 올라 있었다. 너무나 창피했다. 농학박사라는 사람이 일본말 찌꺼기로 농업강의를 하고, 그게 일본말 찌꺼기인지도 모른 채 전문지식인양 자랑하고 다녔던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국립국어원에 가서 강의도 받고, 열심히 책도 사서 읽었다. ‘국어책’읽을 시간 있으면 논문 하나 더 보라는 동료 말도 무시하고 열심히 ‘국어책’을 읽었다. 책을 보면 볼수록 모르는 게 많이 나오고,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아는 것이 너무나 하찮게 느껴졌다. 그러면서 시나브로 우리말의 뿌리를 알게 되고, 민족 얼과 넋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 사십이 넘어 이제야 겨우 우리말에서 민족혼을 조금이나마 엿보면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나는 일본말을 무척 싫어한다. 내가 일본말을 싫어한다고 하면 “그건 자격지심이다”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 세계화 시대에 일본말과 한자를 배척할 필요가 없다고 핏대를 세운다. 한 술 더 떠, 영어는 잘도 쓰면서 일본말을 싫어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를 지배한 것에 대한 열등감이라고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은 똑같다. “내가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를 강제로 지배했고, 그 시기에 우리 민족혼을 짓밟았기 때문이다. 말은 그 나라 민족 혼이 들어 있다. 일본이 우리를 지배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것이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우리 이름을 못 쓰게 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의 넋을 없애고자 그랬던 것이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지금까지 일본말찌꺼기를 쓴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혼을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고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기에 꾸준히 하는 말이다.

우리의 생각은 말과 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 말과 글이 어른들의 잘못으로, 일본말찌꺼기를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 어른들의 잘못으로, 더럽혀진 채 학생들까지 쓰고 있다. 우리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학생들이 일본의 더러운 영혼과 함께 사는 것이다.

말과 글은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부침 속에서 이웃한 다른 나라 언어로부터 끊임없이 간섭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간섭을 받더라도 받아들이는 주체가 올바로 서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가을을 대표하는 꽃은 살사리꽃이다. 가을바람에 살랑거리는 꽃잎을 보고 그런 멋진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 ‘살사리꽃’을 찾아보면, ‘코스모스의 잘못’이라고 나온다. 우리나라 국어사전이 우리말을 버리고 외래어를 표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니 해돋이나 해넘이보다 일출이나 일몰이라는 말을 더 써도 뭐라 할 말이 없다.

책은 낱말을 모아 글을 만들고 그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그 글이 깨끗하면 우리의 넋도 깨끗해진다. 그 글이 아름다운 낱말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 영혼도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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